Tuesday, July 31, 2018

Happiness depends on how we see ourselves

[fǎn zhě dào zhī dòng: "To return is the movement of the way."-from Dao De Jing]


Happiness does not depend on how much we have, how famous we are, or how high our social position is. Rather, it depends on how we see ourselves. If we are content with what we have or what we are, we feel tranquility. 

In many cases, however, people feel unhappy because they are not satisfied with what they have or who/what they are. So they seek more and more without knowing what will happen tomorrow. 

Obviously, in some cases, the issue is the opposite; that is the problem of absolute poverty. If someone is in that dire situation of poverty, nothing is more important than having a basic income that may sustain his/her family.   

We should go back to the simple truth that we are small or nothing.  



  

Sunday, July 29, 2018

[깊은 사색]예수는 이 땅에 왜 왔을까?


예수는 이 땅에 왜 왔을까를 질문하고 답하기 전에 이 질문부터 먼저하자.
"우리 각자는 왜 이 땅에 왔을까?"
옛날 초등학교 때 박정희가 집권하던 시절이었다.
국민교육헌장이란 것이 어느 날 발표되고 우리 학급 담임께서
어느날 외우라고 하여 하루만에 외웠던 기억이 난다.
거기에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
뭐 틀린 말도 아니다.
박정희로서는 집권의 정당성을 그 어떤 발전의 이데올로기로 치환하여야 했겠다.
각자는 애매한 민족중흥이라는 큰 목적에 걸맞는 삶을 살아야 했고
정부는 그것을 위하여 자유와 인권을 짓밟아도 된다고 생각했겠다.
모든 한국인은 "민족중흥이라는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라고
하는 순간, 거기엔 전체주의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어떻게 개인 각자가 스스로 생각하는 인생의 의미와 그 탄생의 뜻을 정부가 정해준단 말인가?

우리는 왜 이 세상에 왔을까?
정답은 없고, 아니 참 대답은 모른다이다.
왜라는 질문에 함몰되다보면 양극단에 빠지기 쉽다.
한 끝은 지나친 낙관과 목적주의에 빠지는 것이고
또 다른 끝은 비관주의에 빠지는 것이다.
나는 중간을 붙잡는다.
지나친 낙관도 금물이고 지나친 허무주의도 피해야 한다.
그러면서 한가지 붙드는 것은,
인간은 뭔가 붙들어야 살게 되어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어쩔수 없이 인정하면서,
이 세상에 온 이상 그것은 생명의 축복이다.
이 생명은 하나님께로 부터 왔다. 이 생명을 감사하고 풍성하게 살아야 한다. 내가 귀하면 다른 사람도 귀하고 다같이 그 풍성함을 누려야 한다.
물론 풍성함이란 의미는 따져보아야 할 것이다.

예수는 이 세상에 왜 왔을까?
그도 스스로 온 것이 아니다.
스스로 생명을 창조할 수 없다.
누군가의 부모에 의해서 태어난 생명이다.
요셉이든 아니든 마리아와 함께.
그러나 그의 탄생비화는 정교한 해석을 요구하는 뭔가가 있다.
그는 소위 정상적인 가정에 태어난 것이 아니다.
이복형제와 남매, 홀어머니 마리아(요셉은 일찍 돌아간 것으로 추정)와 함께 살며
그는 좀 특이했다고 보여진다. 관심이 남달랐다. 내성적이었다. 깊은 생각의 소유자였다.
동네 사람들은 그를 그냥 불쌍한 집, 마리아의 아들이라고 하면서 깔보았다.

그는 자기의 탄생을 어떻게 생각하고 어떤 의미를 부여했을까?
그는 갈릴리 나사렛 촌동네에서 자라며 무얼 보고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는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고 큰 결단의 길로 나아가기 전에 어디서 무엇을 했을까?
무엇이 그로 하여금 늦은 나이에 괴로운 길을 선택했을까?
오늘날도 의와 정의를 위하여 목숨을 아까와 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으니
우리가 이해 못 할 것도 없겠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이것이다.
예수는 단순히 이 땅에 죄인을 위하여 죽으러 온 것이 아니다.
그의 인생을 그렇게 단세포적으로 재단하는 것이야말로 그의 삶과 생명의 신성함을
송두리째 부정하는 것이 아닌가?

그의 삶과 죽음은 후세에 전해져 다양하게 해석되었다.
마가복음에서는 그가 많은 사람의 생명의 풍성함을 위하여 자기의 생명을 주었다(막 10:45).
마태복음에서는 그는 율법의 정신을 바로 깨우치고 해석한 선생으로 왔으며 율법과 선지자를 완성하기 위해 왔다(마 5:17).
누가복음에서는 "잃어버린 자"를 찾고 구하러 왔다(눅 19:10).
요한복음에서는 "(하나님의)진리를 증거하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났다"(요 18:37).




Friday, July 27, 2018

[깊은 사색]예수의 죽음에 대한 생각들

[전주 치명자산 순교지에서 차정식 교수와 함께, 2018년 6월]

이 글은 차정식 교수의 페북 포스팅("예수의 죽음을 조명하는 몇 가지 관점")에 내가 답글한 것을 바탕으로 편집한 것이고 원래 포스팅의 정황과는 관계없이 추가해서 쓴 것이다. 최근에 죽음이라는 주제의 여러개의 그의 글에 감사를 전한다. 나 또한 이 주제에 관심이 많다. 2018년 6월 한국방문시 전주에 갔을 때 친절하게 맞이해주어 더욱 감사하고 카톨릭 성지인 치명자산 순교지까지 안내해 주었다. 산 꼭대기에 있는 이 묘까지 올라가느라 숨을 헐떡거렸다. 왜 죽음은 이리 높은 곳에 있을까? 죽음의 주제와 여기 순교자의 묘는 묘하게 어울린다. 그래서 함께 찍은 사진을 대문에 올렸다.

예수의 죽음과 인간과의 관계성을 연관지을 때 예수를 속죄제(sin-offering)로 나 대신(substitution) 감당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관점이 과거 2000년간 지속되어왔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조금은 다르지만 거의 비슷한 맥락의 propitiation과 expiation개념을 적용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 뜻은 크게 다르지 않다. Propitiation이란 것은 주로 헬레니즘 문화/종교에서 사용하는 개념인 바 "화가 난 신"을 달래기 위한 제물을 말하고 expiation이란 것은 "보상" 혹은 "댓가"라는 개념인 바 망가진 관계를 회복하는 데 필요한 것이다.

그런데 이런 주류적 관점이 많은 도전을 받고 있다. 예를 들면, 막 10:45도 인간의 죄 때문이 아니라 약자와 억압당한 자를 해방시키기 위한 예수의 희생의 삶으로 보는 학자도 있다. 마가복음에서 죄의 문제는 세례를 받고 회개하면 되고 예수의 죽음이 요구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런 형태의 희생은 moral sacrifice라 할 것이다.


바울서신에 나타나는 대속의 죽음에 대한 묘사도 천편일률적으로 읽어왔던 게 사실이다(갈 1:4; 롬 3:25; 5:8; 고전 15:3). 그러나 이것도 정교한 해석의 문제이다. 바울이 전통적 속죄/대속론의 입장에서 썼는지는 의문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 스스로 생각하는 죽음, 혹은 무엇이 그를 죽음으로 몰고 갔는가이다. 우리는 이 점을 간과하는 경향이 있다. 그 다음으로 예수 이후의 사람들이 회고하며 그의 삶과 죽음을 다시 리뷰하는 신학은 2차적인 반응이다. 그런데 이 2차반응 중에 가장 위험한 생각은 "예수는 죽고 나는 안 죽어도 된다"는 생각, 혹은, "예수는 나의 죽음을 죽었기에 나는 이제 영원히 산다"는 것이다. 매우 이기적이고 나이브(naive)한 생각이다.



[치명자산 순교지 꼭대기 모습: 십자가 오른쪽 큰 바위는 예수가 
겟세마네 동산에서 하늘을 향하여 기도하는 자세와 닮았음을 
어느 새벽 기도하러 간 어떤 신부가 발견였다고 함]

오히려 우리는 예수가 왜 죽었을까를 거듭 질문하면서 남은 자들의 "비겁"을 괴로와 해야 하지 않을까?
불의의 폭력 앞에 처참하게 쓰러져간 인간 예수의 약함을 괴로와해야 하지 않을까?
왜 하나님은 악이 승리하듯 내버려둔단 말인가?
죽음을 불사한 그의 신념과 용기는 어디서 나왔단 말인가?

하나님은 그의 죽음을 어떻게 이해할까?
바울은 로마서 3:25에 하나님이 예수를 hilasterion(히브리어: ha kapporet)으로 삼았다 했는데 무슨 말인가?
이 단어를 속죄제물("a sacrifice of atonement")로 많이 번역하는데 과연 그런 뜻으로 바울이 사용한 것인가?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정의인가?
이런 정의는 문제가 많지 않은가?

바울은 예수가 "우리를 위해서(huper) 죽었다"고 했는데 무슨 말인가?
우리대신 형벌을 받았단 말인가?
아니면 우리가 죽지 않아서 죽은 것이 아닌가?
즉, 우리가 죽지 않고 이기적이고 자기 중심적이고 남을 죽이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지 않았기 때문이 아닌가?
이런 것을 회개해야 할 것이 아닌가?
이제는 그 분이 보여주고 실천한 의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말이 아닌가?

또, 바울은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를 위하여(huper) 죽었다"고 했는데 무슨 뜻인가?
예수는 우리의 죄의 빚을 갚거나 죄의 형벌을 대신 받았단 말인가?
아니면 우리의 죄 때문에 죽었다는 말인가?
그러면 우리가 죽였다는 말이 아닌가?
우리는 모든 사람, 권력이 아닌가?
그의 죽음으로 인하여 우리의 죄를 깨닫고 이제 의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말이 아닌가?

바울은 어디서도 예수의 죽음으로 족하다고 말한 적이 없다.
오히려 반대다.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위해 죽었으니 모든 사람이 죽었다(고후 5:14).

제발 그의 죽음을 가벼이 여기지 말라.

제발 그의 죽음을 쉽게 해석하지 말라.



Thursday, July 26, 2018

We have to resurrect Jesus!!!


Jesus cannot be domesticated! In Resurrecting Jesus Kim asks the fundamental two-prong question, "What, then, can we learn from Jesus, and how can we build on the significance of his life and work as we do theology for our day in the here and now?" 

Kim abandons the traditional divide between criticism and theology and argues that a solid New Testament theology can be reconstructed from a critical study of the historical Jesus. Jesus is put back into the context of first-century Judaism in Palestine. 

Resurrecting Jesus reexamines Jesus' life, work, death, and resurrection, giving readers 

  • a better, clearer understanding about the historical Jesus and the New Testament writings that refer to him; 
  • an exploration into the significance of Jesus' life, teaching, and death, based not on doctrine but on his work of God in first-century Judaism and Palestine; 
  • and a redefinition of New Testament theology that is a process of discerning and engaging the historical Jesus and the New Testament writings.




"Kim's work is well organized, easy to read, and written with passion. He often advances positions and moves forward without giving detailed arguments for them, but he provides sufficient documentation to the reader in scholarly literature for those who are interested in studying the pros and cons for his stance. This documentation mostly negates one criticism I had of his work: that he tries to do too much in too few pages. Also, this reviewer appreciates Kim's transparency in stating his positions openly and clearly, alerting the reader through excellent organization to the flow of the argument. Finally, how unique and different is his "alternative approach" to doing New Testament theology (xii, 23, 108)? Whether fresh and new or merely a different approach, Kim's work would be useful for reflective reading in a Christology course to give students variety in their studies of the historical Jesus and New Testament theology." 
--from Review of Biblical Literature


"Farewell to New Testament theology as usual. Kim has struck the heart of the matter. This is a bold and fresh reading that seeks to resurrect a Jesus who points his finger to God and squarely situate him in his first-century Palestinian context. Reading Jesus against the grain, Kim provides a provocative textbook that is sure to stimulate interest and discussion. For those who had abandoned, domesticated, or otherwise misappropriated Jesus, this is a must-read.'' --Robert Wafawanaka, Virginia Union University

''This is a book that both theologians and biblical scholars--who have been concerned about an unnecessary dichotomy between the two disciplines--have long awaited. Readers will deeply appreciate Kim's clear and fresh approach to New Testament theology as a process of discerning and engaging historical Jesus and New Testament texts. I highly recommend this book not only for research but also as a textbook for various courses in theological education.'' --Seung Ai Yang, Chicago Theological Seminary

''Yung Suk Kim's Resurrecting Jesus is a rare synthesis of historical criticism and spiritual passion. Kim boldly challenges the conventional divide between theology and history. Making the words and deeds of the historical Jesus the foundation for theology, Kim redefines central concepts of the New Testament in ways that are relevant to seekers for ethical consistency in a harsh world.'' --L. L. Welborn, Fordham University


Wednesday, July 25, 2018

Hope


I noticed the following quote from online; it is so powerful an understanding about hope. 
Our hope is to plant ourselves at the gates of hope--not the prudent gates of Optimism, which are somewhat narrower; nor the stalwart, boring gates of Common Sense; nor the strident gates of self-righteousness, which creak on shrill and angry hinges; nor the cheerful, flimsy garden gate of "Everything is gonna be all right," but a very different, sometimes very lonely place, the place of truth-telling, about your own soul first of all and its condition, the place of resistance and defiance, the piece of ground from which you see the world both as it is and as it could be, as it might be, as it will be; the place from which you glimpse not only the struggle, but joy in the struggle--and we stand there, beckoning and calling, telling people what we are seeing, asking people what they see. --Victoria Safford 

Tuesday, July 24, 2018

눅 15:11-32 비유 다시 읽기: "큰 아들/형이 나쁜 사람인가?"



흔히들 눅 15:11-32을 "탕자의 비유"라 하는데 틀린 것은 아니지만 알맞은 제목은 아니다. 이 비유는 한 아버지와 두 아들이 있는, 즉,  어머니와 딸이 등장하지 않는 조금은 이상한 그런 집이다. 또 흔히 큰 아들/형을 속이 좁은 나쁜 사람으로 해석하며 나아가 알레고리적 해석으로 그를 유대인들로 보기도 한다.  사실 그럴까? 그렇지 않다. 

비유 속에서 큰 아들은 훌륭한 아들이다. 묵묵히 아버지를 도와 오랫동안 들에서 일을 하며 가정을 일구는 모범적인 아들이다. 동생의 과도한 요구와 집을 떠남에 아마도 적잖은 분노를 느꼈을 것이다. 그것을 허락하는 아버지도 못 마땅해 했을 것이다. 이런 태도는 당연하고 합리적이다. 가정의 질서와 정의를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검사”(prosecutor)의 역할을 하며 정의를 세우려는 정의의 목소리이다. 

분명히 동생의 행위는 잘못 되었다. 동생이 돌아오는 날도 큰 형은 들에서 땀 흘리며 일을 하였다. 아직 아무 것도 해결되지 않은 시점에 그는 동생이 돌아왔다는 소식과 아버지가 그를 위하여 잔치를 베풀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매우 화가 나서 견딜 수 없었다. 큰 아들의 입장은 잘못에 대한 댓가를 치러야 한다는 것이다. 그가 단순히 속이 좁은 사람이거나 아버지의 뜻을 이해 못하고 동생을 무조건 미워하는 그런 형이 아니다. 

그는 집 밖에서 서성거렸다. 잔치하는 집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이 형은 매우 조심스럽고 생각이 많은, 사려가 깊은 형인 것 같다. 이 때, 아버지가 알아차리고 큰 아들을 찾아 집 밖으로 나왔다. 여기서 아버지는 분명히 하며 큰 아들을 위로한다. “너는 내 아들이고 내 모든 것은 네 것이다. 내가 지금 기뻐하는 것은 단 한가지 이유이다. 죽었다고 생각했던 저 철부지가 살아 돌아온 것!”  

여기서 비유가 끝이 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아버지는 큰 아들을 버리고 작은 아들을 선택한 것이 아니다. 구약에서는 흔히 두 형제 중 동생을 축복하고 형을 버리는 이야기가 많다(예: 가인과 아벨, 에서와 야곱). 그러나 이 비유에서는 그런 구약의 논리를 따르지 않는다. 두 아들 모두 아버지의 귀한 아들이다. 아버지는 한 가장으로서 두 아들 모두 사랑하는 것이고 한 아들이라도 없으면 그것은 참 가정이 아니다. 

아버지의 입장에서 지금 중요한 것은 화해의 가정을 세워 나가는 것이다, 그것이 시간이 걸리더라도. 지금 작은 아들을 받아들인다고 해서 이 아들이 면죄부를 받는 것은 아니다. 그는 자기의 진정한 변화된 삶을 보여야 할 것이다.




Sunday, July 22, 2018

예수를 살리자




"예수를 살리자"
다소 생경하고 도전적이다. 무슨 말인가? 예수의 삶과 정신을 오늘에 되살리자는 말이다. 

그러면 또 왜라고 질문할 것이다. 오늘날 그를 따르는 종교인들이 얼마나 많은데 그런 소리 하는가 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오늘날 그를 연구하고 따르고 섬기는 많은 사람들이 그를 제대로 이해하고 그의 정신을 살고 있는가? 대답은 그렇지 않다. 

그래서 [예수 되살리기] 하자이다.  어떻게 되살릴 것인가? 그러면 죽은 예수를 살려야 하는데, 죽은 예수의 모습을 분석해야 할 것이다. 이것은 은유적 비유적 표현이다. 그에 대해 잘못 알고 있는 것들을 먼저 말한 후에 올바른 모습을 그려내야 할 것이다. 교리와 교회안에 갇힌 예수를 해방시키고 그를 살려내야 할 것이다. 

물론 나는 완벽한 그의 모습, 정신, 행적을 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차이가 많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나는 열정을 가지고 연구를 하고 가르치고 말하고 있다. 기회가 되면 한국말로 [예수 되살리기 프로젝트 시리즈]의 책을 출간하고 싶다. 여기 이 시리즈 명을 먼저 공표하니 함부로 이것을 도용하는 것은 곤란하다. 여기 블로그 날짜 시간 기준이 하나의 증거가 된다.

이런 관심과 열정에 따른 작은 연구성과물이 영어로 2015년에 출간한RESURRECTING JESUS: THE RENEWAL OF NEW TESTAMENT THEOLOGY이다. 이 책에 대한 서평을 좋게 받기도 하였다. 그래서 더욱 고무적이다. 앞으로 더욱 매진하여 좀 더 이 분야의 연구에 공헌하고자 한다. 



Saturday, July 21, 2018

겨자씨 비유에 대한 단상

[이 사진은 전주의 치명자산 순교지에서 
찍은 것이다. 차정식 교수의 인도에 감사]

겨자씨 비유는 여러가지를 시사한다. 우선은 작다고 무시하지 마라이다. 작음의 잠재성을 인정하라. 그리고 다른 하나는 성장이나 목표지향적 태도를 견제하기도 한다. 크고 화려한 것만 좋아하는 세태를 도전한다. 하나님 나라에선 작은 자들이 많아야 하고 그래야 은혜가 넘치고 봉사가 활발하며 꼭 필요하고 의미 있는 일을 하게 된다. 무조건 크고 웅장하고 대단한 일을 하는 것을 목표로 해선 안 된다.

사실상 겨자식물은 커 봤자 수 미터에 불과하다. 물론 씨의 크기와 비교하면 수 만 배 이상 성장한 것이니 기적에 가깝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겨자식물이 세상에서 제일 가는 식물, 제일 큰 나무도 아니다. 나무 중에 제일 큰 나무는 115m 정도 되는 것이 현존한다. 백향목같이 아름다운 나무도 세상에 많다. 세상에서 누가 제일 크냐, 큰 교회냐, 그런 것이 성공을 좌우하는 것이 아니다. 무조건 커야 한다는 성장제일주의가 아니다. 이 비유를 잘못 오해하면 그렇게 읽게 된다.




Wednesday, July 18, 2018

왜 복음서에 "씨"에 대한 비유가 여러개 있을까?


복음서에 "씨"에 대한 비유가 4개 정도 나온다: 1) 씨뿌리는 자(공관복음); 2) 겨자 씨(공관복음); 3) 몰래 자라는 씨의 비유(마가); 4) 그리고 곡식과 가라지 비유(마태)이다. 씨 뿌리는 자에서 포커스는 씨 뿌리는 자이며 그의 행위를 눈여겨 봐야 한다. 겨자 씨의 비유에서 초점은 그 씨의 작음에 있고,  몰래 자라는 씨의 비유에서 중점은 몰래 자라는 씨의 놀라움에 있다. 곡식과 가라지 비유에서 중점은 혼재하여 자라는 밭이라는 현실에 있다. 

예수가 각 비유를 말했다면 각 비유는 다 다르고 다른 현실을 상정하고 다른 포인트를 말하고 있다. 즉, 삶의 정황이 다르다. Context가 다르다. 그러므로 이 다름을 섞어 하나의 결론을 내려하는 것은 무리다. 세상이 복잡하고 문제가 다르듯이 같은 씨라는 소재를 썼어도 각 비유에서 상정하는 현실문제는 다르다.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서는 세상의 고난과 방해, 어떤 역경에도 불구하고 씨는 뿌려져야 하며 그 풍성함을 바라보고 살라는 것이다. 씨가 무엇을 말하는지 그리고 씨가 떨어지는 환경이 무엇을 말하는지는 해석의 문제다.

그리고 겨자 씨의 비유에서는 "작음"의 역설적 힘을 강조하며 그 진실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작다고 무시하지 말라. 여기서도 작음이 무엇을 말하는지는 해석의 문제다.

몰래 자라는 씨의 비유에서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인간의 능력이 매우 제한되어 있으므로 여러가지 조건과 은혜를 감사하라는 것이다. 할 일은 하되 기다릴줄 알아야 한다.

마태에서 곡식과 가라지의 비유에서는 선/악의 공존의 현실 앞에 우리가 취해야 할 바람직한 태도에 대해서 질문한다. 예수도 이런 문제를 그의 사역에서 직면하고 그는 바리새인들과 달랐다. 후자는 세상을 쉽게 구분한다: 우리편과 악. 그러나 예수는 그런 구분을 무너뜨리고 창녀와 세리와도 교류했다. 이 비유에 대해선 이미 포스팅한 바 있으므로 아래에 옮긴다.

"곡식과 가라지" 비유는 마태에만 나오는 비유이다. 그래서 몇가지를 고려해야한다. 첫째, 이것이 예수의 원비유에 있는 것인가? 즉, 예수의 비유라면 어디까지 원비유이고 어떤 부분이 후에 첨가된 것일까? 만약, 예수의 원비유를 발굴하는 것에 중점을 두고 예수의 이야기에 관심을 가진다면 그는 어떤 현실을 염두에 두고 어떤 점을 그의 독자와 소통하려 하며, 어떤 놀라움과 도전을 주고자 하는가? 이것이 하나의 해석의 줄기가 될 수도 있고,

둘째, 혹은 예수의 원비유에는 일부있지만 마태가 많이 편집하였는가? 그렇다면 왜 그렇게 했을까? 즉, 마태에 중점을 두어 마태의 신학을 발굴하고자 하는 시도이다. 마태는 어떤 부분을 추가하고 어떤 알레고리적 해석을 하는가? 마태의 신학적 입장에서 이 비유가 어떻게 이용되고 있는가에 중점을 두는 해석의 길로 갈 수도 있다. 대개, 이 비유는 굉장히 마태적인 색깔이 덧입혀진 것으로 본다. 즉, 교회안의 선/악인의 공존, 세상에서도 그렇고, 그러나 최후심판까지 심판을 보류하고 각자 최선을 다하라는 메시지로 본다. 

세째, 이야기의 출처에 관계없이 이 비유를 메타포적인 이야기로 읽을 수도 있다. 이때 질문하게 되는 강력한 내용은 이것이다: 현실은 밭에 알곡과 가라지가 같이 자란다는 것이다. 이것을 두고 대처하는 주인의 방법은 굉장히 반전통적이다. 여기에 바로 비유의 도전이 있고 다시 생각해야하는 "아하" 순간이 있다.


Sunday, July 15, 2018

Ten most important lessons of the parables of Jesus


From: READING JESUS' PARABLES WITH DAO DE JING


1. Sow seeds to the ground as widely as possible without discrimination
    Sower
    *Dao De Jing 5, 49


2. Know that you cannot do all
    Seed Growing Secretly
    *Dao De Jing 71


3. Acknowledge the coexistence of good and evil
    Wheat and Weed
    *Dao De Jing 74


4. See the hidden potential
    Leaven
    *Dao De Jing 66


5. See the power of small
    Mustard Seed
    *Dao De Jing 52

6. Think from other person’s perspective
    Vineyard Workers, Good Samaritan
    *Dao De Jing 22, 25, 40, 45, 77


7. Do not compete with others; find a way to live together
    Father and Two Sons, Pharisee and Tax Collector
    *Dao De Jing 8


8. Find the most valuable and live with it
    Pearl
    *Dao De Jing 56
9. Do your best without fear
    The Parable of Talents
    *Dao De Jing 13, 50


10. Do not fill your mind
    Rich Fool, Empty Jar (Gospel of Thomas)
    *Dao De Jing 3, 9, 15


Saturday, July 14, 2018

"곡식과 가라지" 비유에 대한 단상



"곡식과 가라지" 비유는 마태에만 나오는 비유이다. 그래서 몇가지를 고려해야한다. 첫째, 이것이 예수의 원비유에 있는 것인가? 즉, 예수의 비유라면 어디까지 원비유이고 어떤 부분이 후에 첨가된 것일까? 만약, 예수의 원비유를 발굴하는 것에 중점을 두고 예수의 이야기에 관심을 가진다면 그는 어떤 현실을 염두에 두고 어떤 점을 그의 독자와 소통하려 하며, 어떤 놀라움과 도전을 주고자 하는가? 이것이 하나의 해석의 줄기가 될 수도 있고,

둘째, 혹은 예수의 원비유에는 일부있지만 마태가 많이 편집하였는가? 그렇다면 왜 그렇게 했을까? 즉, 마태에 중점을 두어 마태의 신학을 발굴하고자 하는 시도이다. 마태는 어떤 부분을 추가하고 어떤 알레고리적 해석을 하는가? 마태의 신학적 입장에서 이 비유가 어떻게 이용되고 있는가에 중점을 두는 해석의 길로 갈 수도 있다. 

대개, 이 비유는 굉장히 마태적인 색깔이 덧입혀진 것으로 본다. 즉, 교회안의 선/악인의 공존, 세상에서도 그렇고, 그러나 최후심판까지 심판을 보류하고 각자 최선을 다하라는 메시지로 본다. 

세째, 이야기의 출처에 관계없이 이 비유를 메타포적인 이야기로 읽을 수도 있다. 이때 질문하게 되는 강력한 내용은 이것이다: 현실은 밭에 알곡과 가라지가 같이 자란다는 것이다. 이것을 두고 대처하는 주인의 방법은 굉장히 반전통적이다. 여기에 바로 비유의 도전이 있고 다시 생각해야하는 "아하" 순간이 있다.

이 비유를 메타포로 읽으면 좋은 씨와 가라지가 무엇을 말하는지에 대해서도 여러가지로 해석할 수 있다.  그 둘의 관계 속에서 메타포가 주는 상상력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다. 참고로, 비유해석의 방법론 중 논쟁은 알레고리로 읽을 것인가 아니면 메타포로 읽을 것인가이다. 알레고리는 비유의 현실적, 비전통적 이야기를 축소하거나 왜곡하는 경향이 있고 그래서 오늘날 메타포로 읽는 것이 대세이다. 





Thursday, July 12, 2018

[new book] Toward Decentering the New Testament: A Reintroduction


Toward Decentering the New Testament
A Reintroduction
(Cascade, 2018)
Mitzi J. Smith
Yung Suk Kim

paperback isbn: 978-1-5326-0465-2
hardcover isbn: 978-1-5326-0467-6
ebook isbn: 978-1-5326-0466-9

This introductory text is a seminal introduction to the New Testament. Decentering familiar interpretations of the New Testament, we ask: Whose text is it? and How can we interpret it?

이 책은 독창적인 신약성서 입문서이다. 그동안의 신약의 역사와 해석에 대한 다툼이면서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책인가,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를 질문한다.


Description:
Toward Decentering the New Testament is the first introductory text to the New Testament written by an African American woman biblical scholar and an Asian-American male biblical scholar. This text privileges the voices, scholarship, and concerns of minoritized nonwhite peoples and communities. It is written from the perspectives of minoritized voices. The first few chapters cover issues such as biblical interpretation, immigration, Roman slavery, intersectionality, and other topics. Questions raised throughout the text focus readers on relevant contemporary issues and encourage critical reflection and dialogue between student-teachers and teacher-students.

Endorsements:
“This is the book I wish had been assigned in my days as a young Christian college undergraduate student. The authors go beyond pointing out the hubris of those who think a New Testament introduction can somehow be politically objective or ideologically neutral. Instead, they show us how a ‘de-centering’ of Scripture—in all its messiness—can serve as a form of ‘resistance literature’ which opens up ways of thinking otherwise and of imagining new worlds altogether.”
—Roberto Sirvent, Hope International University

“This exemplary volume represents refreshingly unchartered terrain in New Testament introductions, with conceptual and theoretical analyses that will help the reader understand why apprehending the noetic complexities of the politics of empire and power, gender, race, intersectionality, migration, postcolonial theory, and questions of hybridity, and subaltern agency, are thoroughly indispensable in interrogating early Christian origins, and in adjudicating the ever-evolving iterations and often contested implications of what this history means for critical pedagogies and practices of resistance, hope, and justice in our times.”
—Clarice J. Martin, Colgate University, Hamilton, New York

“Mitzi Smith and Yung Suk Kim offer a refreshing orientation to the New Testament that privileges marginalized perspectives, and deftly challenges many traditional assumptions about texts. Impressive in its scope and depth, the book masterfully explicates both historical-cultural contexts such as slavery and contemporary issues like migration. Anyone who reads this book will see the New Testament in a very different light. A much-needed addition to biblical scholarship.”
—Raj Nadella, Columbia Theological Seminary

“Authors bring to the literary surface voices often relegated to the margins. The margin does not replace the center, but through historical, racial, ethnic, class, and gender analyses the book provides tools on how to dismantle its metes and bounds. This work renders a less hegemonic and more inclusive hermeneutical lens for studying the New Testament and the context that produced its content.”
—Stephanie Buckhanon Crowder, Chicago Theological Seminary

“This book establishes so many firsts. The most important may be that it marks a liminal moment in NT studies. In foregrounding what has been in the background it will open up new worlds of learning for students and teachers alike.”
—Michael Joseph Brown, President of Payne Theological Seminary


Contents

Foreword by Michael Willett Newheart | vii

Chapter 1: Introduction | 1

Section I: Interpretation and Contexts
Chapter 2: Biblical Interpretation: An Invitation to Dialogue | 11
Chapter 3: Greco-Roman and Jewish Influences on
     the New Testament | 31
Chapter 4: Refugees, Immigrants, and Foreigners in
     the New Testament | 39
Chapter 5: Roman Slavery and the New Testament | 45
Chapter 6: Intersectionality and Reading Complexity in
     the New Testament | 52
Chapter 7: The Privatization of Water, Ancient Rome, and
     the New Testament | 61
Chapter 8: Some Matters of Translation and the New Testament | 67

Section II: The Gospels and Acts
Chapter 9: The Danger of a Single Story: The Synoptic Gospels | 75
Chapter 10: Gospel of Mark | 84
Chapter 11: Gospel of Matthew | 105
Chapter 12: Gospel of Luke | 139
Chapter 13: Gospel of John | 161
Chapter 14: The Acts of the Apostles | 176

Section III: Pauline Epistles
Chapter 15: Significance of Paul as a Jewish Man in Diaspora | 195
Chapter 16: The Body of Christ | 201
Chapter 17: Romans | 205
Chapter 18: 1 Corinthians | 221
Chapter 19: 2 Corinthians | 236
Chapter 20: Galatians | 246
Chapter 21: Ephesians | 254
Chapter 22: Colossians | 262
Chapter 23: Philippians | 266
Chapter 24: Philemon | 272
Chapter 25: 1–2 Thessalonians | 279
Chapter 26: 1–2 Timothy and Titus | 285

Section IV: Catholic Texts
Chapter 27: Letter of James | 295
Chapter 28: Jude | 302
Chapter 29: 1–3 John | 307
Chapter 30: 1 Peter | 311
Chapter 31: 2 Peter | 315
Chapter 32: Hebrews | 319

Section V: The Apocalypse of John/The Book of Revelation
Chapter 33: Contemporary and Ancient Apocalyptic Texts
     and Their Significance | 329
Chapter 34: Apocalypse of John/Book of Revelation | 334

Bibliography | 353


Wednesday, July 11, 2018

뉴스앤조이 기고: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 새로운 이해의 필요성



한국 뉴스매체에 처음으로 기고하게 되어 여기 글이 나왔다. 뉴스앤조이. 이번 글은 한국에서 특강을 하고 여러분들과 교류하면서 이런 글이 필요하겠다 싶어서 미국으로 돌아오자마자 바로 썼다. 글을 실어준 뉴스앤조이 편집진과 중간에 다리를 놓아준 제3시대 그리스도교 김진호 실장님께 감사한다. 또한 삼인 홍승권 대표님께 작은 선물이랄까, 저녁자리에서 함께 언급한 내용이라서? 그리고 한국에서 함께 한 여러 분들, 특히 우진성 박사님, 이영재 박사님과 IBP 콜로케 관계자, 목회자 콜로키움 지도자, 목사님들께 감사드린다.  http://www.newsnjoy.or.kr/news/articleView.html?idxno=218590

Monday, July 9, 2018

Reading Jesus' Parables with Dao De Jing



paperback isbn: 978-1-5326-5491-6
hardcover isbn: 978-1-5326-5492-3
ebook isbn: 978-1-5326-5493-0


CONTENTS

1 Introduction | 1
2 Parables from the Perspective of “Impartiality” | 5
3 Parables from the Perspective of “Smallness” | 10
4 Parables from the Perspective of “Softness/Weakness” | 15
5 Parables from the Perspective of “Gravity” | 20
6 Parables from the Perspective of “Lowliness” | 24
7 Conclusion | 28

Appendix: A New Translation of the Dao De Jing | 31


Dao De Jing is an ancient wisdom book, purportedly written by Laozi, who flourished in the sixth century BCE according to the Chinese tradition. It comprises of eighty-one short poems of which the source is diverse, ranging from personal life to communal and political life. It uses abundant metaphors taken from nature such as water, dust, river, wood, river, and valley. Laozi reminds his readers to rethink their worldview and purpose of life. 


Parables of Jesus also are stories about life, ranging from personal identity to social justice. Laozi and Jesus lived in different places at different times. Yet they share a passion and vision to make a better world, full of mercy, justice, and peace. Laozi asks his audience to appreciate the power of smallness in their perspectives. Likewise, in the Mustard Seed, Jesus also helps his audience to see the potential of small seed that may grow miraculously to several feet tall. This book reads Jesus’ parables from the perspective of the Dao De Jing. 


"In this deceptively slim volume, Kim explores powerful ancient wisdom in the teachings of both Laozi and Jesus. Drawn from natural metaphors about many aspects of life, Kim reveals their abiding common themes such as humility, the value of lowliness and smallness, or maintaining a balanced perspective on life. He unpacks the potential laden in humble beginnings and things forsaken. Kim succeeds in communicating compelling readings of life's experiential knowledge". --Robert Wafawanaka, Samuel DeWitt Proctor School of Theology, Virginia Union University

"Yung Suk Kim’s uncanny ability to read the New Testament from the insights of ancient Asian wisdom equips him to do an innovative exercise in biblical interpretation. Once again, Kim presents newly provocative reflections on the parables of Jesus in this creative work. Here the exemplary teacher cordially invites readers to the hermeneutical excitement and rewards of understanding biblical texts cross-culturally. A new translation of the Dao De Jing is an additional boon." --Chan Sok Park, The College of Wooster




Sunday, July 8, 2018

예수의 비유와 정의의 문제 (한신대 신대원 특강)

한신대 신학대학원 특강 [요약본​]



예수의 비유와 정의의 문제
김영석 교수 (Yung Suk Kim)
버지니아 유니온 대학교 (Virginia Union University)

May 30, 2018



인간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정의”만큼 중요한 것이 있을까 생각해본다. “정의”라는 한자의 뜻은 바르고 의롭다이다. 혹은 바르고 옳은 것을 말한다. 영어로는 justice이고 성서적 개념에서는 justice외에 righteousness도 있다. 각자 무엇이 바르고 의로운 일인가를 정의할 수는 있겠지만 실상은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왜냐하면 정의의 개념이 하나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때로는 어떤 삶의 현장에 정의의 개념을 잘못 적용할 수도 있다. 우리가 무엇을 옳다고 할 때 그렇게 말하는 정의의 기준을 밝힘과 함께 과언 그렇게 말하는 정의가 전부인지 아니면 다른 모습의 정의가 있을 수 있는지 늘 살펴야 한다. 인간의 삶이 다양하고 복잡한만큼 거기에 따르는 정의의 모습도 그러하다. 한 가지의 정의의 개념으로 모든 삶의 현상에 적용할 수가 없다. 그래서인지 예수의 비유가 다양하고 비유에 따라서 다른 개념의 정의가 적용된다. 본 특강에서는 먼저 비유의 간단한 종류와 개념을 알아보고, 그 다음으로 성서에서 “정의”의 개념을 찾아보고, 마지막으로 예수의 비유 중 세개를 골라 그 가운데 말하고 있는 정의의 문제를 짚어보고자 한다.
I. 정의의 종류와 개념
1. Attributive justice (귀속적 정의)
정상적인 환경아래에서 각자는 일한 만큼 보상을 받는다. 정상적인 환경: 일하는 조건이나
개인의 능력이 비슷할 때.
2. Retributive justice (보복적, 징벌적 정의)
잘못을 저지른자는 정의의 법정에 세워지고 합당한 벌을 받고, 피해는 보상되고 불의의 원인은 명명백백하게 밝혀지고 재발이 방지 되는 것. 복수와는 다르다. 복수는 법의 근거없이 과도하게 갚아주는 것.
3. Distributive justice (경제 배분적 정의)
사회의 구성원의 수요에 비추어 부의 균등한 배분이 필요. 공동으로 생산한 부가 골고루
나눠지어 혜택이 돌아가게 하는 것. 경제적 정의가 해당.
4. Social justice (사회적 정의)
인간의 사회생활에서 겪는 여러가지 차별적 요소를 없애는 것: 성차별, 계급주의, 인종차별,
혈통주의, 지역주의, 학벌주의, 종교차별 등을 없애는 것. 사회의 시스템적 정의를 확립.
5. Restorative justice (회복적 정의)
병들고 다친 사람에겐 회복이 필요하며 이를 사회가 지원한다.
6. Procedural justice (절차적 정의)
의사결정 과정의 투명성과 공평성이 이루어져야 한다.
7. Eco-justice (환경적, 생태적 정의)
인간은 어떻게 자연과 동물을 공평하게 대할 것인가? 기후와 환경문제 해결 등도 시급.
위에서 보듯이 정의의 문제는 다양하고 주어진 환경에 따라 다른 정의가 필요하다.
II. 성서에서 찾는 정의
1. 어떤 점에서 하나님을 옳다고 할 것인가? 공평한 사랑, 변하지 않는 사랑, 미래를 책임지는 사랑, 약자를 보살피는 사랑, 악을 심판하는 것, 억울함을 풀어 주는 것 등 다양한 의미에서 그를 옳다고 할 것이다.
2. 예수가 옳다고 할 때, 무슨 의미인가? 그가 본성이 선하거나 옳다는 것이 아니라 그가 한
행위가 옳은 일이며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한 일이었다. 그는 무엇을 하였는가? 하나님의 의를 이루기위해 헌신한 것이다.
-마태 5:17: 예수는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그것을 완성하고 의를 이루기 위해 왔다.
-마태 6:33: 하늘의 통치와 그의 의가 이 땅에 이루어지도록 노력하라.
3. 하나님을 따르는 자들이 옳다 할때 무슨 말인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의 의를 좆아 사는 사람들이다. 하늘의 길을 따르고 예수의 믿음을 본받아 헌신하는 자들이다. 하나님을 따르는 자들이 어떻게 하는 것이 바르고 옳은 일인가?
배고픈 자에게 빵을 공급하는 것, 약한 자를 도우고 강하게 하는 것, 일할 수 없는 자에게 보상을 하는 것, 일할 능력이 있는 자에게 일자리를 주는 것, 억울한 자의 한을 풀어주는 것 등이다. 인간생활이 다양하고 복잡하기에 그에 상응하는 정의도 다양하다.
III. 예수의 비유와 정의의 문제
예수의 비유도 여러가지 정의의 문제를 취급한다.
갑작스런 사고나 질병, 부채 등으로 거리로 나 앉으면 사회적 도움이 필요하다. 이것은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에서 본다. 사람이 억울한 일을 당하면 그것을 풀어야 한다. 이러한 정의는 과부와 불의한 재판관의 비유에서 본다. 일을 하고 싶은데 일자리가 없으면 일할 자리가 주어져야 하고 공평한 배분도 중요하다. 이것은 포도원 주인의 비유에서 본다. 열심히 일한 만큼 보상이 따른다. 달란트의 비유에서 본다.
비유해석에서 유의해야 할 점은 예수의 비유는 어떤 확립된 정통적 교훈을 주려는 것이 아니라 청중을 놀라게 하고 기존의 지식과 습관을 타파케 하고, 청중 스스로 비유의 이야기에 반응하고 질문하도록 도우는 것이다. 즉, 예수는 어떤 결론을 미리 말하지 않는다. 이야기 속에 도전적 요소가 숨어 있지만 때로는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자기가 보고 싶은 것, 듣고 싶은 것만 듣기 때문이다.
1. 달란트의 비유에서 보는 귀속적 정의 (마태 25:14-28)
두 가지의 해석이 상충된다. 혹자는 이 비유의 이야기를 반권력적 저항의 스토리로 읽는다. 즉, 악덕주인에게 돈 벌어주기를 싫어하여 1 달란트 받은 자는 의도적으로 장사를 하지 않고 땅에 숨기었고 나중에 본전 그대로 돌려주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과연 이 비유에서 이런 메시지가 중심일까? 주인의 이야기를 자세히 보면 그가 책망하는 이유는 단순히 돈을 못 벌었기 때문이 아니라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는데 있다. 즉, 능력과 기회가 있는데도 그것을 이용하지 않고 썩히었기 때문이다. 반대로 2, 5 달란트 받은 자는 열심히 일하였고 그 결과 다행히 큰 성과를 거두었다. 여기서 만약 이들이 실패하였을 때 주인은 어떤 반응을 보일 것인가? 아마도 큰 책망은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주인은 얼마나 노력을 하였느냐를 보는 것이다. 이 비유는 그러므로 “노력”을 강조하고 그에 따른 보상이 있음을 강조하는 “귀속적” 정의에 해당한다.
2. 포도원의 비유와 배분적 정의 (마태 20:1-16)
포도원의 주인이 행하는 일이 하늘의 일과 흡사하다 할 것이다. 그런데 그의 행위는 사회의 여타 주인들과는 확연히 다르다. 그는 다섯번씩이나 노동시장에 가서 일꾼을 구하여 포도원에 보냈고 모두에게 동일한 임금을 지불했다. 사실, 그는 그것을 약속했고 약속한 일당은 하루 살아가기에 적당한 임금, 한 데나리온이었다. 아주 많은 것도 적은 것도 아닌 적당한 일당이다. 이렇게 동일하게 지급을 하자 일찍 포도원에 온 자들이 불평을 하였다. 그런데 그들의 불평이 법적으로 근거가 없다. 왜냐하면 고용될 때 한 데나리온에 계약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들이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였고 욕심이 발동한 것 뿐이다. 엄밀히 따지면 그들이 더 열심히 일을 했다는 증거도 없다. 오히려 늦게 포도원에 온 자들이 더 열심히 일 했을 수도 있다. 주인은 분명히 말한다. 자기는 “선”하기에 그렇게 한다는 것이다. 즉, 포도원에 일하는 모든 사람은 그날의 일당을 가져가야 한다. 비록 늦게 온 자도 하루의 일당이 필요하다. 사실, 늦게 온자도 늦게 오고 싶어서 그렇게 한 것이 아니다. 아무도 고용하지 않아서이다. 어떤 성과나 노동시간에 관계없이 균등하게 주는 일당은 배분적 정의에 해당한다.
3. 과부와 불의한 재판관과 보복적, 징벌적 정의 (눅 18:1-8)
이 비유는 기도에 관한 것이 아니다. 누가는 그렇게 해석하고 자기의 텍스트에 넣었을 뿐이다. 원비유에 중점을 두고 보면, 이 비유는 “한”을 갚는 정의이다. 보복적 정의가 필요하다. 보복은 복수와는 다르다. 보복은 법에 입각한 정의로서 잘못한 자는 그에 대한 결과에 책임을 지고 처벌을 받아야 하고 피해는 보상되어야 하고 불의 원인은 밝혀져야 한다. 그러므로 사회 전체가 이를 계기로 발전할 수 있다. 이 과부는 어떤 억울한 일을 당하였고 이를 풀기 위해 재판관을 끈질기게 찾아가서 마침내 불의한 재판관이지만 귀찮아서 그녀의 요구를 들어 주었다는 이야기이다.
이처럼 다양한 정의는 오늘 우리에게 필요하다. 작금 한국사회가 정의가 조금씩 눈에 보이게 진보해가는 것을 볼 때 아주 기분이 좋다. 정의가 살아 있으면 개인도 행복하고 사회도 발전한다. 한국의 교회의 책임 또한 막중하다. 교회 안에서 정의를 이루고 개인이 정의에 서며 사회를 향한 다양한 정의의 필요성에 귀를 기울이고 하나님의 정의가 골고루 이 땅에 이루어지도록 해야 한다.

The danger of an "all or nothing" attitude


Regarding the North Korea issue, “all or nothing” policy or thinking would be not only ineffective but dangerous. History proves it. Denial of others is a form of autocracy. Trusting others and negotiation must go together.   

In South Korea, the main opposition party of conservatives opposes South Korean President Moon’s reconciliation approach to North Korea because he is not from them. Apparently, these people ask North Korea to give up all first and come back with nakedness.  

In contrast, if you ask liberals in Korea or about 80 percent of Koreans there, I mean the absolute populace in South Korea, they will tell you they full-heartedly support Moon’s open approach to North Korea. They do so. There is a consistent survey result in this trend. What can you tell about this? For many South Koreans, Trump is much appreciated in his efforts and goodwill toward denuclearization in the Korean Peninsula. 

In the USA, however, there is an atmosphere that the opposition party and many liberals do not trust or support the Trump administration’s ongoing efforts to make a peaceful Korean Peninsula because he is not one of them. What is going on here? It is so interesting. 

Saturday, July 7, 2018

A book review of Messiah in Weakness

"Messiah in Weakness" was reviewed in Asian American Theological Forum. I give thanks to this site.
In Messiah in Weakness, Yung Suk Kim presents an alternative understanding of weakness. He portrays the historical Jesus through a lens of weakness that deconstructs the traditional dualistic understanding of strength and weakness, in which strength is seen as positive and characteristics such as mercy, solidarity, and change of mind are considered weak and negative. Kim repudiates the theology that considers human or social weakness as the result of sin (2) and the view that the only way for individuals to get out of this “fatal” weakness is to believe in Jesus (the “strong”), who took the form of weakness and died on the cross for them (3).
The full version can be found here.

Friday, July 6, 2018

A book review of Resurrecting Jesus

I think this review of my book (Resurrecting Jesus) is fair enough. What follows is is the last section of the review:
"Kim’s work is well organized, easy to read, and written with passion. He often advances positions and moves forward without giving detailed arguments for them, but he provides sufficient documentation to the reader in scholarly literature for those who are interested in studying the pros and cons for his stance. This documentation mostly negates one criticism I had of his work: that he tries to do too much in too few pages. Also, this reviewer appreciates Kim’s transparency in stating his positions openly and clearly, alerting the reader through excellent organization to the flow of the argument. Finally, how unique and different is his “alternative approach” to doing New Testament theology (xii, 23, 108)? Whether fresh and new or merely a different approach, Kim’s work would be useful for reflective reading in a Christology course to give students variety in their studies of the historical Jesus and New Testament theology." --from Review of Biblical Literature (The full review can be found in RBL 2018).

Sunday, July 1, 2018

한국방문을 마치며


23년의 공백을 메우다
이제는 떠나야 할 시간
많은 사랑과 그리움을 

안고 떠난다.

그동안 함께한 짧은 만남 속
두터운 인연들을 감사한다.


꼭 만나야했던 사람들

뜻하지 않았지만 뜻한듯 
강렬하고 감사한 만남들
다시 꼭 만나고 싶은 분들


오래 기억하고픈 순간의 여운들
이 모든 것을 뒤로 하고 떠나지만
다시 만날 수 있다는 희망을 

안고 떠난다.

인생은 한 줄기 바람이다
옅은 숨결의 안식
거친 호흡의 생산
실바람의 설렘과 낭만
이 바람이 생명을 분다.


하늘도 바람
성령도 바람
나도 바람이 되어
물이 되어 
살으리라

함께 한 많은 분들과 오래
감사와 사랑의 바람이고 싶다.


이제는 돌아가야 할 시간
많은 얼굴을 기억하고 감사한다.


나 가진 것 없어도 

그 무엇이 아니라 하더라도
믿어준 분들께 사랑한다 말하리. 


김영석 드림

[나의 방문중 여러가지 행사를 기획하고 도와준 우진성 박사, 그리고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실장 김진호 목사님께 심심한 감사를 드린다. 그리고 나의 친구, 이인희 교수 (경희대), 연세대의 임성욱 교수, 홍국평 교수께도 감사한다. 그리고 한신대의 김창주 교수, 전철 교수께도 감사드리고, 전주 한일장신대의 차정식 교수의 배려에도 감사드린다. 대천의 노병진 목사님께 감사한다. 친절을 베푸신 삼인출판사 홍승권 대표께도 감사한다. 페북이 없어 태그하지 못하는 분들께도 감사드린다. 특히, 성공회대 양권석 교수님, 김은규 교수님, 박태식 신부님 (만나지는 못했었어도), 조철규 목사님, 전주의 이영재 박사님, 광주의 장관철 목사님, 나주의 문병석 목사님, 인천의 김광오 목사님, 서울의 박노훈 박사님, 한동대의 가요한 교수, 혹시 이름을 빠뜨렸다면 용서해주기 바랍니다. 아, 그리고 한신대에서 도와주신 염시온 목사님, 성공회대 엄지 조교님, 그외에도 많은 분들이 도와주셨는데... 참, 오호영 목사님, 대천에서]

I've had a wonderful time in Korea during the past forty days. I made formal lectures, conducted seminars for graduate students, had pastors' colloquia and some fun talks with others, not to mention other fun visits and events. I am glad to fill in a gap of the past 23 years since I left if not complete.

우진성 박사와 함께 

우진성 박사에게 책을 건네며

오이도에서 

양권석 교수와 김진호 목사님

성공회대 석/박사과정 학생들과 콜로키움을 마치고

연세대 신대원에서 특강

성공회대 콜로키움

전주지역 콜로키움

한신대 신대원 교수진

연세대 임성욱 교수, 홍국평 교수와 함께

연세대 특강후 학생들과

연세대 특강중

정동진에서

경희대 근방에서 생맥의 시원함

전주 치명자산 순교지에서 차정식 교수와 함께

 IBP 전주 스콜레(이영재 박사)에서 

전남. 광주 목회지 콜로키움

IBP 전주 스콜레에서 특강중 

충남 대천에서 특강후

인천지역 콜로키움

인천에서 선교100주년탑앞 김광오 목사님과

전주시립미술관에서 조철규 목사님과

나주 빛가람교회에서 


한신대 캠퍼스에서

삼인출판사 홍승권 대표와 함께

친구 이인희 교수와 함께 경희대에서

밴더빌트 동문 가요한 교수와 함께


졸업후 처음 방문하는 나의 초등학교에서

강릉 경포해변에서